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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택선 지음,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작성자
이택선
작성일
2021.06.19
첨부파일1
조회수
151
내용




책소개

한국 현대사 빅뱅의 순간 우리의 지도자

구한말 반역을 꿈꾼 청년 지도자 시절부터
4.19 혁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까지
발걸음 아래 현대사를 정초한 거인 ― 우남 이승만의 정치 역정

이 책의 목적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 제1, 2공화국까지 활동한 정치지도자 이승만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그의 리더십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는지, 그리고 종국에 소멸하는지 소개한다.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그의 성격에 기인한 부분도 크지만 상당 부분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시대가 이승만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했고 이는 당대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물 유형에서도 확인이 된다. 무엇보다 안보도 경제도 보장되지 않은 미숙한 나라,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외국을 상대로 한 외교 협상을 위해서나 국내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을 위해서도 카리스마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고, 후대는 그 흔적을 감정하여 그를 영웅, 독재자,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택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과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 기획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건설의 시대 1945〜1950』(단독, 2020),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1. 근대 전환기 한계인의 탄생
2.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3. 옥중에서 벼린 꿈
4. 미국으로 향하다
5. 민족지도자의 길
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7. 어두운 시대를 여는 변혁의 리더십

제2부 신생 대한민국의 지도자

1. 새로운 투쟁의 서막
2. 분단의 열린 가능성
3. 취약국가 대한민국
4. 국가 건설
5. 신생 대한민국의 전쟁
6. 대통령과 민주주의
7. 빛나는 외교, 막 내리는 전쟁

제3부 근대 전환기의 한계인

1. 영광의 절정에서
2. 본격화된 리더십의 붕괴
3. 대한민국의 부활
4. 앙시앵 레짐이 되어가는 정부
5. 외교 리더십의 붕괴
6. 벌거벗은 임금님
7.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맺음말

연보
참고 문헌
주석
찾아보기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영웅, 독부,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이승만을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인생 궤적을 쭉 따라가 보면 그는 언제나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로서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조정에 맞섰을 때 그는 혁명가였다. 민영환의 호의로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국의 독립을 청원했을 때 그는 독립 투사였다. 3.1운동의 정신을 살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근대 정치 제도인 공화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넓은 인맥과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외교 독립 노선을 끝까지 지켜낸 지도자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포들에게 항일 의식을 일깨운 지도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그는 공도 과도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인물, 자타공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구한말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

오랫동안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이승만은 원래 서양 문명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1894년 조정이 갑오경장을 실시하여 청년들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도록 장려하자 기꺼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런데 불과 수년 만에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된 그의 눈에 비친 왕정은 혁파의 대상, 앙시앵 레짐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역모를 꾀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거인들의 삶에서 종종 발견되듯이, 감옥 시절은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주변의 수인들이 매질을 당하고 처형되는 살풍경 속에서도 그는 기독교에 마음을 열고 서양 문명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며, 묵묵히 저술 활동을 해나갔다. 특히 공화제와 교육입국에 대한 신념은 이때 구체화되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이승만은 큰 포부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던 하와이가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을 청원하고 윌슨 대통령을 은사로 모신 그는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조국으로부터 멀리 떠나 온 한인들은 그에게 항일의 방략을 듣길 원했고 자연스레 그에게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삶이 지워졌다.

카리스마의 탄생

3.1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한국인들은 근대 국가의 수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은 통합의 구심점을 찾았고 이승만이 적임자로 낙점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특히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그의 외교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이 사망하고 국제연맹에 - 독립이 아닌 -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이 문제가 되어 그의 외교 독립 노선은 임시정부 내에서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는 탄핵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질적으로 다른 지도자로 거듭났다. 상하이에서 쫓겨나듯이 하와이로 온 그는 1921년 ‘동지회’를 창립하면서, 이전까지는 충성스러운 지지 세력이나 카리스마가 없어서 자신에 대한 불편한 언동을 무기력하게 두고 볼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면서 심지어 “여러분이 경찰도 되고 몽둥이도 되어서 악한 분자를 처치하는 데 일심협력해 달라”고 말한다. 이는 이승만에게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지도자

이승만은 인생 내내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그를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어 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정적을 만들고 그 자신을 가혹한 현실 앞으로 밀어붙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수많은 존재가 그의 앞에서 무너뜨려야 할 벽이 되었다. 구한말 조선 조정과 고종이 그랬고, 임시정부 시절 사회주의자와 무장 투쟁론자들이 그랬으며, 해방 직후에는 좌파가, 그리고 정부 수립안을 놓고서는 미군정과 좌우 합작 세력이 벽이 되었다. 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회와 야당이 그런 존재였으며, 6.25 전쟁의 시기에는 미국과 유엔 또한 넘어서야 할 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언제나 신념에 대한 확신과 함께 현실을 바꾸었고, 한국 현대사를 정초한 수많은 일이 그의 발걸음 뒤에서 만들어졌다. 근대 공화정의 시작, 국제 관계에 바탕을 둔 독립, 반공‧반소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한미 동맹 등이 모두 그 증거이다. 심지어 그 그림자에 해당하는 문제도 모두 쌍둥이처럼 같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관철하기 위한 여정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통령제로 시작되었으나 사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대다수 국회의원은 전통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집단이었다. 만약 5.10 제헌 선거에서 한민당이 크게 승리했다면 지금 우리 헌법의 모습은 사뭇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한민당이 국민의 심판을 당한 것에 준하는 결과가 나왔고,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에게 지금처럼 강한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선출 권한이 국회에 있었고, 여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생 대한민국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위한 통치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승만은 불명예스러운 역사로 남게 된 부산 정치 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그리고 자유당 창당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반민주주의적 행태는 이승만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 이후부터는 권위주의적 조치들이 남발되면서 대중의 지지라는 차원에서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본격적으로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미국을 상대로 한 빛나는 외교

6.25 전쟁 동안에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북진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완전한 승리가 아닌 한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국의 개입 없는 불완전한 평화보다 차라리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이 낫다는 것이었다. ‘휴전보다 차라리 전쟁이 낫다’는 이러한 발상은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명운을 건 처절한 논리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정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된 1953년 초부터 이것을 강력한 외교 협상의 무기로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1953년 6월에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 상호방위 조약과 경제 원조 제공을 약속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정전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한미 동맹은 진한 우정의 결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또 이승만은 친미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조차 자신의 신념에 복무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였다.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이라는 아이젠하워의 소회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너무도 다루기 어려운 지도자였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약소국 지도자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약속해야 했다.

앙시앵 레짐이 되어 가다

나라를 자유 진영에 편입시키고, 전쟁과 토지개혁의 결과로 국가에 새로운 역동성이 주입되고, 미국이라는 동맹을 얻은 이승만은 지도자로서 영광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리더십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먼저 그의 외교 리더십을 뒷받침해 준 미국이 그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국내적으로도 이승만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의 정치 리더십에 도전하는 야당 지도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 이승만 정부가 1952년부터 실시한 의무 교육의 결과로 마치 이승만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대가 사회의 주역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눈에 비친 이승만 정권은 너무나 결함이 많은 정권, 앙시앵 레짐이었다.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이승만은 1957년경부터 정신적 건강 면에서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이후 정권 말기에는 이기붕의 건강마저 악화되어 국정 운영이 자유당의 강경파 관료와 경무대의 일부 비서진의 손에 넘어갔다. 오늘날 이승만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승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비공식 조직을 ‘인의 장막’이라고 부르면서 그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 내각과 자유당 상층부는 어느덧 친일 경력의 인물들이 잠식했고, 이승만의 주변은 그의 리더십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로 채워졌다. 이때 제1공화국 초기의 중요한 안배는 확연히 후퇴해 있었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이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경무대에서 학생 단체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사태의 해결 방안을 구하였다. 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이승만이 시대의 변화에 굴복해 소통의 요구를 수용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의 봉인이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경선은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족보를 설명하며 왕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16대나 위로 올라가 이미 희미해진 왕가의 핏줄을 확인하는 이 일은 언뜻 몰락 양반 가문에서 일어나는 헛되고 부질없는 짓일 수 있지만 사실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행위였다. …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가 왕이 나올 묫자리를 빼앗는 불경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등극시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을 ― 고종이 즉위한 1864년으로부터 11년이 지난 1875년에 이승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 이경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경선 역시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리고 아들을 그런 인물로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을 것이다. 21-22

매일신문은 외국의 이권 쟁탈과 조선 정부의 무능을 폭로하여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불을 붙인 매체였고, 만민공동회는 이승만이 청년 지도자로 부상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거칠게 말해 이승만이 논설을 쓰고 민심이 이에 반응하는 가운데 그 자신이 만민공동회에서 스타가 된 것인데, 이는 그가 신문을 계몽의 매체로뿐만 아니라 정당의 대용물로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이승만은 겨우 24세의 청년이었다.  31

임시의정원의 불신임 결의안 가결에도 불구하고 탄핵이 3년여에 걸쳐 지연된 진정한 이유는 이승만이 거만하게 이를 방관하며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임시정부 내에서는 여전히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론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고 이승만은 다시 기회를 얻고 있었다. 즉 그는 계속해서 일했고 임시정부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75

이승만의 판단으로는 자신보다 20여 세나 어린 아들뻘에 불과하고 또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여기는 야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 먼저 장면은 이승만이 보기에 지나치게 친미적이어서 자주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황이 어려워지자 미국 정부에게 한국 교포 7천 명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한국 정부의 망명을 부탁할 만큼 국난을 극복할 만한 배포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178-179

4.19 혁명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혁명 그 자체는 분명 사람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에는 4.19 혁명을 주도한 학생과 청년, 도시 지식인과 다른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 같은 상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 11월 장면이 수반이 된 제2공화국 정부는 전국의 유권자 가운데 3천 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중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에 관한 설문이 있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형벌을 과하길 원치 않았고 또 그가 국내에 거주하기를 바랐다. 처벌을 원하는 사람은 8.8%에 지나지 않았다.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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