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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선 지음,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이택선 지음 | 이조 펴냄 | 2021년 05월 30일 발행ISBN 979-11-87607-51-9 (94340)979-11-87607-55-7
책소개한국 현대사 빅뱅의 순간 우리의 지도자
구한말 반역을 꿈꾼 청년 지도자 시절부터
4.19 혁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까지
발걸음 아래 현대사를 정초한 거인 ― 우남 이승만의 정치 역정
이 책의 목적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 제1, 2공화국까지 활동한 정치지도자 이승만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그의 리더십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는지, 그리고 종국에 소멸하는지 소개한다.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그의 성격에 기인한 부분도 크지만 상당 부분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시대가 이승만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했고 이는 당대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물 유형에서도 확인이 된다. 무엇보다 안보도 경제도 보장되지 않은 미숙한 나라,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외국을 상대로 한 외교 협상을 위해서나 국내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을 위해서도 카리스마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고, 후대는 그 흔적을 감정하여 그를 영웅, 독재자,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택선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과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 기획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건설의 시대 1945〜1950』(단독, 2020),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목차책을 펴내며
제1부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1. 근대 전환기 한계인의 탄생
2.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3. 옥중에서 벼린 꿈
4. 미국으로 향하다
5. 민족지도자의 길
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7. 어두운 시대를 여는 변혁의 리더십
제2부 신생 대한민국의 지도자
1. 새로운 투쟁의 서막
2. 분단의 열린 가능성
3. 취약국가 대한민국
4. 국가 건설
5. 신생 대한민국의 전쟁
6. 대통령과 민주주의
7. 빛나는 외교, 막 내리는 전쟁
제3부 근대 전환기의 한계인
1. 영광의 절정에서
2. 본격화된 리더십의 붕괴
3. 대한민국의 부활
4. 앙시앵 레짐이 되어가는 정부
5. 외교 리더십의 붕괴
6. 벌거벗은 임금님
7.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맺음말
연보
참고 문헌
주석
찾아보기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영웅, 독부,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이승만을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인생 궤적을 쭉 따라가 보면 그는 언제나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로서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조정에 맞섰을 때 그는 혁명가였다. 민영환의 호의로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국의 독립을 청원했을 때 그는 독립 투사였다. 3.1운동의 정신을 살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근대 정치 제도인 공화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넓은 인맥과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외교 독립 노선을 끝까지 지켜낸 지도자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포들에게 항일 의식을 일깨운 지도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그는 공도 과도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인물, 자타공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구한말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
오랫동안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이승만은 원래 서양 문명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1894년 조정이 갑오경장을 실시하여 청년들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도록 장려하자 기꺼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런데 불과 수년 만에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된 그의 눈에 비친 왕정은 혁파의 대상, 앙시앵 레짐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역모를 꾀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거인들의 삶에서 종종 발견되듯이, 감옥 시절은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주변의 수인들이 매질을 당하고 처형되는 살풍경 속에서도 그는 기독교에 마음을 열고 서양 문명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며, 묵묵히 저술 활동을 해나갔다. 특히 공화제와 교육입국에 대한 신념은 이때 구체화되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이승만은 큰 포부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던 하와이가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을 청원하고 윌슨 대통령을 은사로 모신 그는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조국으로부터 멀리 떠나 온 한인들은 그에게 항일의 방략을 듣길 원했고 자연스레 그에게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삶이 지워졌다.
카리스마의 탄생
3.1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한국인들은 근대 국가의 수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은 통합의 구심점을 찾았고 이승만이 적임자로 낙점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특히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그의 외교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이 사망하고 국제연맹에 - 독립이 아닌 -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이 문제가 되어 그의 외교 독립 노선은 임시정부 내에서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는 탄핵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질적으로 다른 지도자로 거듭났다. 상하이에서 쫓겨나듯이 하와이로 온 그는 1921년 ‘동지회’를 창립하면서, 이전까지는 충성스러운 지지 세력이나 카리스마가 없어서 자신에 대한 불편한 언동을 무기력하게 두고 볼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면서 심지어 “여러분이 경찰도 되고 몽둥이도 되어서 악한 분자를 처치하는 데 일심협력해 달라”고 말한다. 이는 이승만에게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지도자
이승만은 인생 내내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그를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어 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정적을 만들고 그 자신을 가혹한 현실 앞으로 밀어붙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수많은 존재가 그의 앞에서 무너뜨려야 할 벽이 되었다. 구한말 조선 조정과 고종이 그랬고, 임시정부 시절 사회주의자와 무장 투쟁론자들이 그랬으며, 해방 직후에는 좌파가, 그리고 정부 수립안을 놓고서는 미군정과 좌우 합작 세력이 벽이 되었다. 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회와 야당이 그런 존재였으며, 6.25 전쟁의 시기에는 미국과 유엔 또한 넘어서야 할 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언제나 신념에 대한 확신과 함께 현실을 바꾸었고, 한국 현대사를 정초한 수많은 일이 그의 발걸음 뒤에서 만들어졌다. 근대 공화정의 시작, 국제 관계에 바탕을 둔 독립, 반공‧반소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한미 동맹 등이 모두 그 증거이다. 심지어 그 그림자에 해당하는 문제도 모두 쌍둥이처럼 같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관철하기 위한 여정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통령제로 시작되었으나 사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대다수 국회의원은 전통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집단이었다. 만약 5.10 제헌 선거에서 한민당이 크게 승리했다면 지금 우리 헌법의 모습은 사뭇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한민당이 국민의 심판을 당한 것에 준하는 결과가 나왔고,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에게 지금처럼 강한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선출 권한이 국회에 있었고, 여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생 대한민국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위한 통치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승만은 불명예스러운 역사로 남게 된 부산 정치 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그리고 자유당 창당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반민주주의적 행태는 이승만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 이후부터는 권위주의적 조치들이 남발되면서 대중의 지지라는 차원에서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본격적으로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미국을 상대로 한 빛나는 외교
6.25 전쟁 동안에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북진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완전한 승리가 아닌 한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국의 개입 없는 불완전한 평화보다 차라리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이 낫다는 것이었다. ‘휴전보다 차라리 전쟁이 낫다’는 이러한 발상은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명운을 건 처절한 논리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정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된 1953년 초부터 이것을 강력한 외교 협상의 무기로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1953년 6월에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 상호방위 조약과 경제 원조 제공을 약속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정전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한미 동맹은 진한 우정의 결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또 이승만은 친미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조차 자신의 신념에 복무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였다.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이라는 아이젠하워의 소회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너무도 다루기 어려운 지도자였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약소국 지도자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약속해야 했다.
앙시앵 레짐이 되어 가다
나라를 자유 진영에 편입시키고, 전쟁과 토지개혁의 결과로 국가에 새로운 역동성이 주입되고, 미국이라는 동맹을 얻은 이승만은 지도자로서 영광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리더십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먼저 그의 외교 리더십을 뒷받침해 준 미국이 그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국내적으로도 이승만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의 정치 리더십에 도전하는 야당 지도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 이승만 정부가 1952년부터 실시한 의무 교육의 결과로 마치 이승만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대가 사회의 주역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눈에 비친 이승만 정권은 너무나 결함이 많은 정권, 앙시앵 레짐이었다.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이승만은 1957년경부터 정신적 건강 면에서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이후 정권 말기에는 이기붕의 건강마저 악화되어 국정 운영이 자유당의 강경파 관료와 경무대의 일부 비서진의 손에 넘어갔다. 오늘날 이승만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승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비공식 조직을 ‘인의 장막’이라고 부르면서 그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 내각과 자유당 상층부는 어느덧 친일 경력의 인물들이 잠식했고, 이승만의 주변은 그의 리더십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로 채워졌다. 이때 제1공화국 초기의 중요한 안배는 확연히 후퇴해 있었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이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경무대에서 학생 단체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사태의 해결 방안을 구하였다. 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이승만이 시대의 변화에 굴복해 소통의 요구를 수용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의 봉인이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경선은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족보를 설명하며 왕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16대나 위로 올라가 이미 희미해진 왕가의 핏줄을 확인하는 이 일은 언뜻 몰락 양반 가문에서 일어나는 헛되고 부질없는 짓일 수 있지만 사실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행위였다. …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가 왕이 나올 묫자리를 빼앗는 불경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등극시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을 ― 고종이 즉위한 1864년으로부터 11년이 지난 1875년에 이승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 이경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경선 역시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리고 아들을 그런 인물로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을 것이다. 21-22매일신문은 외국의 이권 쟁탈과 조선 정부의 무능을 폭로하여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불을 붙인 매체였고, 만민공동회는 이승만이 청년 지도자로 부상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거칠게 말해 이승만이 논설을 쓰고 민심이 이에 반응하는 가운데 그 자신이 만민공동회에서 스타가 된 것인데, 이는 그가 신문을 계몽의 매체로뿐만 아니라 정당의 대용물로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이승만은 겨우 24세의 청년이었다. 31임시의정원의 불신임 결의안 가결에도 불구하고 탄핵이 3년여에 걸쳐 지연된 진정한 이유는 이승만이 거만하게 이를 방관하며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임시정부 내에서는 여전히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론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고 이승만은 다시 기회를 얻고 있었다. 즉 그는 계속해서 일했고 임시정부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75이승만의 판단으로는 자신보다 20여 세나 어린 아들뻘에 불과하고 또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여기는 야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 먼저 장면은 이승만이 보기에 지나치게 친미적이어서 자주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황이 어려워지자 미국 정부에게 한국 교포 7천 명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한국 정부의 망명을 부탁할 만큼 국난을 극복할 만한 배포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178-1794.19 혁명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혁명 그 자체는 분명 사람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에는 4.19 혁명을 주도한 학생과 청년, 도시 지식인과 다른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 같은 상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 11월 장면이 수반이 된 제2공화국 정부는 전국의 유권자 가운데 3천 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중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에 관한 설문이 있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형벌을 과하길 원치 않았고 또 그가 국내에 거주하기를 바랐다. 처벌을 원하는 사람은 8.8%에 지나지 않았다. 276
이택선 2021.06.19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이택선 지음 | 이조 펴냄 | 2021년 05월 30일 발행ISBN 979-11-87607-51-9 (94340)979-11-87607-55-7
책소개한국 현대사 빅뱅의 순간 우리의 지도자
구한말 반역을 꿈꾼 청년 지도자 시절부터
4.19 혁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까지
발걸음 아래 현대사를 정초한 거인 ― 우남 이승만의 정치 역정
이 책의 목적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 제1, 2공화국까지 활동한 정치지도자 이승만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그의 리더십이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는지, 그리고 종국에 소멸하는지 소개한다. 이승만의 카리스마는 그의 성격에 기인한 부분도 크지만 상당 부분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의 시대가 이승만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했고 이는 당대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물 유형에서도 확인이 된다. 무엇보다 안보도 경제도 보장되지 않은 미숙한 나라,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외국을 상대로 한 외교 협상을 위해서나 국내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을 위해서도 카리스마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고, 후대는 그 흔적을 감정하여 그를 영웅, 독재자,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택선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과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 기획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건설의 시대 1945〜1950』(단독, 2020),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목차책을 펴내며
제1부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1. 근대 전환기 한계인의 탄생
2.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
3. 옥중에서 벼린 꿈
4. 미국으로 향하다
5. 민족지도자의 길
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7. 어두운 시대를 여는 변혁의 리더십
제2부 신생 대한민국의 지도자
1. 새로운 투쟁의 서막
2. 분단의 열린 가능성
3. 취약국가 대한민국
4. 국가 건설
5. 신생 대한민국의 전쟁
6. 대통령과 민주주의
7. 빛나는 외교, 막 내리는 전쟁
제3부 근대 전환기의 한계인
1. 영광의 절정에서
2. 본격화된 리더십의 붕괴
3. 대한민국의 부활
4. 앙시앵 레짐이 되어가는 정부
5. 외교 리더십의 붕괴
6. 벌거벗은 임금님
7.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맺음말
연보
참고 문헌
주석
찾아보기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영웅, 독부, 분단의 원흉, 외교의 천재… 이승만을 무엇이라 부르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그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인생 궤적을 쭉 따라가 보면 그는 언제나 한국 정치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로서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조정에 맞섰을 때 그는 혁명가였다. 민영환의 호의로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국의 독립을 청원했을 때 그는 독립 투사였다. 3.1운동의 정신을 살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근대 정치 제도인 공화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넓은 인맥과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외교 독립 노선을 끝까지 지켜낸 지도자였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포들에게 항일 의식을 일깨운 지도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그는 공도 과도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인물, 자타공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구한말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
오랫동안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한 이승만은 원래 서양 문명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1894년 조정이 갑오경장을 실시하여 청년들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도록 장려하자 기꺼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런데 불과 수년 만에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가 된 그의 눈에 비친 왕정은 혁파의 대상, 앙시앵 레짐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역모를 꾀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거인들의 삶에서 종종 발견되듯이, 감옥 시절은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주변의 수인들이 매질을 당하고 처형되는 살풍경 속에서도 그는 기독교에 마음을 열고 서양 문명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며, 묵묵히 저술 활동을 해나갔다. 특히 공화제와 교육입국에 대한 신념은 이때 구체화되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지도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이승만은 큰 포부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던 하와이가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을 청원하고 윌슨 대통령을 은사로 모신 그는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조국으로부터 멀리 떠나 온 한인들은 그에게 항일의 방략을 듣길 원했고 자연스레 그에게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삶이 지워졌다.
카리스마의 탄생
3.1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한국인들은 근대 국가의 수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은 통합의 구심점을 찾았고 이승만이 적임자로 낙점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특히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그의 외교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이 사망하고 국제연맹에 - 독립이 아닌 -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이 문제가 되어 그의 외교 독립 노선은 임시정부 내에서 지지를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는 탄핵을 당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질적으로 다른 지도자로 거듭났다. 상하이에서 쫓겨나듯이 하와이로 온 그는 1921년 ‘동지회’를 창립하면서, 이전까지는 충성스러운 지지 세력이나 카리스마가 없어서 자신에 대한 불편한 언동을 무기력하게 두고 볼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면서 심지어 “여러분이 경찰도 되고 몽둥이도 되어서 악한 분자를 처치하는 데 일심협력해 달라”고 말한다. 이는 이승만에게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지도자
이승만은 인생 내내 자기 신념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그를 실패에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어 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정적을 만들고 그 자신을 가혹한 현실 앞으로 밀어붙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수많은 존재가 그의 앞에서 무너뜨려야 할 벽이 되었다. 구한말 조선 조정과 고종이 그랬고, 임시정부 시절 사회주의자와 무장 투쟁론자들이 그랬으며, 해방 직후에는 좌파가, 그리고 정부 수립안을 놓고서는 미군정과 좌우 합작 세력이 벽이 되었다. 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회와 야당이 그런 존재였으며, 6.25 전쟁의 시기에는 미국과 유엔 또한 넘어서야 할 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언제나 신념에 대한 확신과 함께 현실을 바꾸었고, 한국 현대사를 정초한 수많은 일이 그의 발걸음 뒤에서 만들어졌다. 근대 공화정의 시작, 국제 관계에 바탕을 둔 독립, 반공‧반소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립,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한미 동맹 등이 모두 그 증거이다. 심지어 그 그림자에 해당하는 문제도 모두 쌍둥이처럼 같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관철하기 위한 여정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통령제로 시작되었으나 사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대다수 국회의원은 전통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집단이었다. 만약 5.10 제헌 선거에서 한민당이 크게 승리했다면 지금 우리 헌법의 모습은 사뭇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한민당이 국민의 심판을 당한 것에 준하는 결과가 나왔고,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에게 지금처럼 강한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선출 권한이 국회에 있었고, 여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신생 대한민국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위한 통치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승만은 불명예스러운 역사로 남게 된 부산 정치 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그리고 자유당 창당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반민주주의적 행태는 이승만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 이후부터는 권위주의적 조치들이 남발되면서 대중의 지지라는 차원에서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본격적으로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미국을 상대로 한 빛나는 외교
6.25 전쟁 동안에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북진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완전한 승리가 아닌 한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국의 개입 없는 불완전한 평화보다 차라리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이 낫다는 것이었다. ‘휴전보다 차라리 전쟁이 낫다’는 이러한 발상은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명운을 건 처절한 논리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정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된 1953년 초부터 이것을 강력한 외교 협상의 무기로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1953년 6월에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 상호방위 조약과 경제 원조 제공을 약속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정전 협상에 임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한미 동맹은 진한 우정의 결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또 이승만은 친미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조차 자신의 신념에 복무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였다. “너무나 불만스러운 동맹”이라는 아이젠하워의 소회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너무도 다루기 어려운 지도자였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약소국 지도자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약속해야 했다.
앙시앵 레짐이 되어 가다
나라를 자유 진영에 편입시키고, 전쟁과 토지개혁의 결과로 국가에 새로운 역동성이 주입되고, 미국이라는 동맹을 얻은 이승만은 지도자로서 영광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리더십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먼저 그의 외교 리더십을 뒷받침해 준 미국이 그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국내적으로도 이승만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의 정치 리더십에 도전하는 야당 지도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또 이승만 정부가 1952년부터 실시한 의무 교육의 결과로 마치 이승만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대가 사회의 주역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새로운 세대의 눈에 비친 이승만 정권은 너무나 결함이 많은 정권, 앙시앵 레짐이었다.
‘인의 장막’ 속에 사라지는 카리스마
이승만은 1957년경부터 정신적 건강 면에서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이후 정권 말기에는 이기붕의 건강마저 악화되어 국정 운영이 자유당의 강경파 관료와 경무대의 일부 비서진의 손에 넘어갔다. 오늘날 이승만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승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비공식 조직을 ‘인의 장막’이라고 부르면서 그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 내각과 자유당 상층부는 어느덧 친일 경력의 인물들이 잠식했고, 이승만의 주변은 그의 리더십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로 채워졌다. 이때 제1공화국 초기의 중요한 안배는 확연히 후퇴해 있었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이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경무대에서 학생 단체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사태의 해결 방안을 구하였다. 이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이승만이 시대의 변화에 굴복해 소통의 요구를 수용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의 봉인이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경선은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족보를 설명하며 왕가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16대나 위로 올라가 이미 희미해진 왕가의 핏줄을 확인하는 이 일은 언뜻 몰락 양반 가문에서 일어나는 헛되고 부질없는 짓일 수 있지만 사실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행위였다. …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가 왕이 나올 묫자리를 빼앗는 불경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등극시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을 ― 고종이 즉위한 1864년으로부터 11년이 지난 1875년에 이승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 이경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경선 역시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리고 아들을 그런 인물로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을 것이다. 21-22매일신문은 외국의 이권 쟁탈과 조선 정부의 무능을 폭로하여 만민공동회의 활동에 불을 붙인 매체였고, 만민공동회는 이승만이 청년 지도자로 부상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거칠게 말해 이승만이 논설을 쓰고 민심이 이에 반응하는 가운데 그 자신이 만민공동회에서 스타가 된 것인데, 이는 그가 신문을 계몽의 매체로뿐만 아니라 정당의 대용물로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이승만은 겨우 24세의 청년이었다. 31임시의정원의 불신임 결의안 가결에도 불구하고 탄핵이 3년여에 걸쳐 지연된 진정한 이유는 이승만이 거만하게 이를 방관하며 아무 일도 안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임시정부 내에서는 여전히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론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고 이승만은 다시 기회를 얻고 있었다. 즉 그는 계속해서 일했고 임시정부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75이승만의 판단으로는 자신보다 20여 세나 어린 아들뻘에 불과하고 또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으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여기는 야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 먼저 장면은 이승만이 보기에 지나치게 친미적이어서 자주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황이 어려워지자 미국 정부에게 한국 교포 7천 명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한국 정부의 망명을 부탁할 만큼 국난을 극복할 만한 배포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178-1794.19 혁명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혁명 그 자체는 분명 사람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에는 4.19 혁명을 주도한 학생과 청년, 도시 지식인과 다른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 같은 상황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 11월 장면이 수반이 된 제2공화국 정부는 전국의 유권자 가운데 3천 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중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에 관한 설문이 있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형벌을 과하길 원치 않았고 또 그가 국내에 거주하기를 바랐다. 처벌을 원하는 사람은 8.8%에 지나지 않았다. 276
이택선 20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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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선 지음,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이택선 지음 | 미지북스 펴냄 | 2021년 07월 15일 발행ISBN 979-11-90498-14-2 (93910)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신생 대한민국이 붕괴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저자소개저자 : 이택선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목차머리말
1장 취약국가론의 배경
현대사를 보는 두 관점|취약국가론의 핵심
2장 취약국가 탄생의 서막
미군정의 상황(1945년 9월~1948년 8월)|미군정기의 경찰|미군정기의 군대|미군정기의 재정·조세 기구
3장 내란의 시작
본격화된 내란과 5·10 총선거|노동쟁의와 파업의 본격화|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좌우익 청년단체|제헌의회 선거와 향보단|제주 4·3 사건
4장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 1
초라한 출발|부족한 예산과 안보 위기로 미뤄진 경찰 개혁|대한민국 초기의 군대|초기의 재정·조세 기구
5장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 2
미국을 만족시킨 젊은 장교들|제헌헌법|좌초된 반민특위|여수·순천 사건|국가보안법과 일민주의|토지개혁|의무교육 실시와 근대인의 정체성 수립|중도파의 국가 건설 참여|국가성의 획득과 기획처의 활약
6장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과대 성장 국가론의 신화|취약국가 형성 과정에서 발견되는 한국 특유의 특징
후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책 속으로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건설을 지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부족한 원조와 지원을 받았지만, 가장 성공적인 신화를 연출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이나 잘못을 기술한 연구들은 많았지만, 실제 건설 과정을 외부의 시선과 국가 건설 이론에 비추어 살펴본 연구는 거의 없었다. (7쪽)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기를 맞은 한국에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먼저 미국이 1947년 7월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미군 철수에 집중하느라 적극적으로 국가 건설에 임하지 않아 한국은 미군정 시기부터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원시적 취약성을 지니는 취약국가로 출발했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소련의 지원하에 신속하게 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37쪽)
초기 미군정 경찰의 행보를 살펴보면 친일 경찰을 제거하고 경찰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모습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1947년 6월 미군정이 작성한 집계에 따르면, 당시 전체 경찰의 80% 이상이 해방 이전에는 경찰에 재직하지 않았다. 경무부 소속 경찰관의 83%, 수도경찰청의 83%, 각 관구 경찰청의 77~88%, 철도 관구 경찰청의 80%가 일본 경찰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77쪽)
후술하겠지만 김석원 등 노련한 일본 군대 경험자들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국가안보의 위기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었고, 그 전까지는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들 스스로가 참여를 기피했다. 따라서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인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의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87쪽)
랜드 연구소의 연구에서는 경찰에게 월급으로 1인당 국민소득의 2~3배를 지불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19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봉급은 국민 평균 소득의 2~3배인 80~120달러가 아니라 3달러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1946년 1월경 소련군정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의 월급은 200루블 정도였는데, 1949년 3월경 스탈린의 환산에 따르면 1달러는 5루블로 계산될 수 있었으므로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았던 셈이다. 또 1950년 2월경 소련 고등군사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던 북한의 위관급 장교들의 경우 소위가 1,300루블 정도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졌는데, 이 금액 역시 약 260달러로 환산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자료들은 북한에 비해 남한의 국가 건설 자금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관심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11~112쪽)
당시 이승만은 치안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자신을 탄핵하는 세력의 선봉에 섰던 신성모에게 내무부 장관과 대한청년단 단장직을 동시에 맡기고 있었다. 이는 출범 초기부터 일종의 내전 상태에 직면해 합법적 폭력에 실패한 경찰과 군대가 청년단체에게 국가 치안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반공주의를 표방한 청년단체의 총인원 수는 600만여 명으로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164쪽)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부의 정통성 중심에 섰을지도 모르는 광복군 출신들은 한국전쟁 이후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 일본군 출신 그룹을 제치지 못하고, 송호성의 몰락과 함께 아무도 참모총장이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빨치산 세력과 북한군 때문에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역시 민족주의적 정통성의 이념 자원이 아니라 안보에 관한 능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176쪽)
이러한 농지개혁의 결과, 1945년 14.2%에 불과했던 자작농의 비율이 1951년 80.7%로 상승했으며 순소작농의 비율 역시 50.2%에서 3.9%로 감소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계급의 비율이 2,3%에서 0.1%로 감소함으로써 지주계급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사실이다. (243쪽)
랜드 연구소의 연구 역시 치안을 국가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다. 최소한의 치안과 안보가 달성된 이후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경제성장의 기반이 제공되고, 최종적으로 외부 지원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법체계를 바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치안과 안보는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경제성장의 기반을 제공하는 개발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중시되어야 한다. (269쪽
출판사 서평‘국가 형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본 해방 전후사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인 이택선 박사(서울대 외교학과)는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따라 핵심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 재정 및 조세 기구의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국제정치적 배경을 살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한 랜드 연구소의 표준 국가 모델과 비교 검토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21세기의 국가 건설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가졌던 대한민국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범적이면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또한 취약국가에서 출발하여 숱한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노출된 취약성이 어떻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을까?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 중 하나인 ‘수정주의’는 한국이 처음부터 과대 성장 국가로 출발했다고 말해왔다. 과대 성장 국가론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근대적인 관료 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비대하게 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국은 처음부터 물적ㆍ인적 자원이 부족하여 국가기구가 허약한 취약국가로 출발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한국은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한 취약국가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가 건설’ 계획이 없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애당초 한국인들의 국가 건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물적 자원이 부족해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매우 불충분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유럽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 비율은 유럽과 일본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봉쇄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서 품위 있게 철수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예산과 자원 부족을 들어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은 공무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봉급마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공무원들이 상납과 뇌물에 의존하고 원조 물자를 밀거래하는 등 부패 문제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민족주의에 의존한 미군정
미군정은 물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이념 자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미군정도 처음에는 경찰과 군대에 친일 부역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항일 투쟁과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가진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고위 관리직에 임명하여 이념 자원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승만과 같은 우파 정치인을 주로 지원하기보다는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중도파들을 포괄하는 연합노선을 시도했다. 청년단체도 극우 반공 단체 대신 임정 출신들을 중심으로 출범해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단체를 공식 후원했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인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관료제 행정을 담당할 인력의 부족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가 국가 건설에 참여하다
1946년 4월부터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자 치안 분야에서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 공산 세력들이 국가 전복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식량 문제가 심각했는데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월남민의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경찰의 부패와 금품 강요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1945년 9월 기준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는 북한 위관급 장교들이 받은 260달러(1,300루블)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식량 부족과 만연한 부패는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1일 대구 항쟁이 발발했다. 대구는 당시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강성한 도시였다.
미군정은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 세력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결국 우파 청년단체들의 협력을 용인했다.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일 관료들도 국가기구에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한국인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경찰력을 증강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이르면 2~3년 전에 비해 경찰 규모가 2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광복군 중심의 군대에서 부일 세력의 군대로
1947년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도 규모가 커져 7개월 만에 3배 증가했다.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의 군 지도부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은 갖췄을지 모르나 현대적 전술과 지식을 구비하지 못했고 무능했다. 1948년 제주 4ㆍ3사건과 여수ㆍ순천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시 기용되었다. 국가안보 위기가 발생하자 일제강점기의 전력을 이유로 스스로 근신하고 있었던 50~60대의 일본군 출신자들이 1947년 말부터 전격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제주도와 여수, 순천, 옹진 지구 등 최전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이와 함께 20~30대의 젊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미국이 요구하는 현대전의 기준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군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국가 건설과 안보 위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협상 결렬로 갑작스럽게 국가 건설이 결정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민의 열망으로 제헌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분단 고착화를 염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1948년 4월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10월에 일어난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군 내 좌익 세력이 제주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여수ㆍ순천 사건은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발생한 좌익의 본격적인 봉기였으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막대한 국가 폭력이 행해졌고 전체 희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여수ㆍ순천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보의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했다. 안보적 위험에서 초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들이 계속 시행되었는데,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또한 반민특위가 해산하게 되었으며, 경찰과 군대 규모가 급증했고, 국가안보의 명목으로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낯선 제헌헌법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
대한민국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족했던 자원들을 대신하여 이념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즉 임시정부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제헌헌법의 제정이다. 특히 제헌헌법이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은 자유시장경제와 현격한 거리가 있어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낯선 측면이 있다. 이는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정치ㆍ경제 및 교육에서의 평등을 강조한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는 국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거리를 두었다. 제헌헌법 역시 중요 자원과 중요 기업에 관해 국유ㆍ국영 제도를 원칙으로 했으며 토지개혁과 의무무상교육을 주창했다. 이렇게 자본주의경제 질서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권리들이 헌법상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헌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정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 부분 자리 잡은 현 시점에서는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물적ㆍ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국가가 직접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들을 운영 관리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적절한 조항들이었다.
토지개혁, 국가 건설의 정점
대통령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추진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국가 건설 과정에 반영하고, 부일 관료들을 계속 기용한 탓에 훼손되었던 민족주의적 이념 자원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수천 년 동안 농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군림하던 지주가 사라지고 국가 구성원 모두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1949년 6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초로 한 농지개혁 법안에 따라 농민들이 농지를 분배받았다. 토지개혁 성공의 이면에는 조봉암의 공로가 컸다. 물론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을 발탁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토지개혁으로 한국민주당의 경제 기반 약화, 농민의 지지 확보, 좌파의 공세 차단이라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자신 소유의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한동안 이승만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북한 공산군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고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중도파의 참여로 안정화되는 신생 공화국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하자, 다수의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과 중도파 인사들이 점차 대한민국의 건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거부했던 다수의 중도파들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부분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특히 삼균주의의 아버지인 조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안재홍, 조소앙, 원세훈, 윤기섭, 오하영 등의 중도파 당선자들이 중도 무소속 세력을 이끌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제1공화국이 점차 안정화되어감에 따라 국가 내부의 자생적인 발전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기획처장 이순탁과 기획처의 중도파 관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획처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기구로, 당시의 기획처는 생산과 분배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려는 중간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순탁은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고 종합적인 국가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50년 즈음에는 예산이 균형을 이루고 세입이 증가했으며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환율이 안정되는 가운데 경제 전망이 바람직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제1공화국은 미국의 지원이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는데도 경제의 부분적 회복과 균형재정을 이루며 한계 속에서도 점차 국가성을 획득해나가고 있었다.
피땀눈물로 이룬 국가 건설의 역사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의 역사는 그 출발선에서부터 안보, 물자, 인력 등 모든 차원에서 자원이 심대하게 부족했다. 따라서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한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은 금세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를 겪음으로 인해 민족을 배신했던 부일 관리들을 기용하고 폭력적인 우익 청년단체를 준국가기구로 활용하여 이념 자원을 훼손하는 질곡의 길을 걸어야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념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족주의적 대의명분과 정치적 정통성은 높으나 국가 관료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던 인물들이 국가 건설 과정 초기에 기용되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과 비능률이 발생했고, 전문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 이후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념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노정된 취약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붕괴하지 않고 살아남아 상당한 수준의 번영을 이루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이택선 2020.11.30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이택선 지음 | 미지북스 펴냄 | 2021년 07월 15일 발행ISBN 979-11-90498-14-2 (93910)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신생 대한민국이 붕괴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자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군대와 경찰 같은 안보 자원뿐만 아니라 재정과 인력 측면에서도 심각한 부족에 허덕였다. 국가는 부족한 물적 자원의 대체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북한이라는 실질적인 군사적 위험, 국내에 발생한 광범위한 저항과 반란의 위협 앞에 민족주의 이념은 수축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생존의 기로에서 국가는 부일 세력과 우익 단체를 국가 건설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안보 위기를 넘겼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폭력과 유혈, 국가범죄로 인해 정치적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토지개혁과 의무교육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국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귀속감이 증대했다. 이를 지켜본 중도파들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가 건설에 대거 참여해 정치적인 정당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적어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ㆍ사회적 안정성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저자소개저자 : 이택선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에서 해방 전후의 한국 정치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연구원과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명 전환기 권력의 이동에 따른 한국의 국가 건설과 외교이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성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역사적 설명과 독자적 이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문화협력체 추진방안 연구』(공저, 2020),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공저, 2019), 『북한과 국제정치』(공저, 2018),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공저, 2014), 『지식과 국제정치』(공저, 2008) 등이 있다.
목차머리말
1장 취약국가론의 배경
현대사를 보는 두 관점|취약국가론의 핵심
2장 취약국가 탄생의 서막
미군정의 상황(1945년 9월~1948년 8월)|미군정기의 경찰|미군정기의 군대|미군정기의 재정·조세 기구
3장 내란의 시작
본격화된 내란과 5·10 총선거|노동쟁의와 파업의 본격화|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좌우익 청년단체|제헌의회 선거와 향보단|제주 4·3 사건
4장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 1
초라한 출발|부족한 예산과 안보 위기로 미뤄진 경찰 개혁|대한민국 초기의 군대|초기의 재정·조세 기구
5장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 2
미국을 만족시킨 젊은 장교들|제헌헌법|좌초된 반민특위|여수·순천 사건|국가보안법과 일민주의|토지개혁|의무교육 실시와 근대인의 정체성 수립|중도파의 국가 건설 참여|국가성의 획득과 기획처의 활약
6장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다
과대 성장 국가론의 신화|취약국가 형성 과정에서 발견되는 한국 특유의 특징
후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책 속으로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건설을 지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부족한 원조와 지원을 받았지만, 가장 성공적인 신화를 연출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이나 잘못을 기술한 연구들은 많았지만, 실제 건설 과정을 외부의 시선과 국가 건설 이론에 비추어 살펴본 연구는 거의 없었다. (7쪽)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기를 맞은 한국에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먼저 미국이 1947년 7월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미군 철수에 집중하느라 적극적으로 국가 건설에 임하지 않아 한국은 미군정 시기부터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원시적 취약성을 지니는 취약국가로 출발했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소련의 지원하에 신속하게 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37쪽)
초기 미군정 경찰의 행보를 살펴보면 친일 경찰을 제거하고 경찰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모습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1947년 6월 미군정이 작성한 집계에 따르면, 당시 전체 경찰의 80% 이상이 해방 이전에는 경찰에 재직하지 않았다. 경무부 소속 경찰관의 83%, 수도경찰청의 83%, 각 관구 경찰청의 77~88%, 철도 관구 경찰청의 80%가 일본 경찰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77쪽)
후술하겠지만 김석원 등 노련한 일본 군대 경험자들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국가안보의 위기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었고, 그 전까지는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들 스스로가 참여를 기피했다. 따라서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인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의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87쪽)
랜드 연구소의 연구에서는 경찰에게 월급으로 1인당 국민소득의 2~3배를 지불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1945년 9월 당시 한국 경찰의 봉급은 국민 평균 소득의 2~3배인 80~120달러가 아니라 3달러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1946년 1월경 소련군정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의 월급은 200루블 정도였는데, 1949년 3월경 스탈린의 환산에 따르면 1달러는 5루블로 계산될 수 있었으므로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았던 셈이다. 또 1950년 2월경 소련 고등군사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던 북한의 위관급 장교들의 경우 소위가 1,300루블 정도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졌는데, 이 금액 역시 약 260달러로 환산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자료들은 북한에 비해 남한의 국가 건설 자금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소련과 미국의 관심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11~112쪽)
당시 이승만은 치안상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자신을 탄핵하는 세력의 선봉에 섰던 신성모에게 내무부 장관과 대한청년단 단장직을 동시에 맡기고 있었다. 이는 출범 초기부터 일종의 내전 상태에 직면해 합법적 폭력에 실패한 경찰과 군대가 청년단체에게 국가 치안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반공주의를 표방한 청년단체의 총인원 수는 600만여 명으로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164쪽)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부의 정통성 중심에 섰을지도 모르는 광복군 출신들은 한국전쟁 이후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 일본군 출신 그룹을 제치지 못하고, 송호성의 몰락과 함께 아무도 참모총장이 되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빨치산 세력과 북한군 때문에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역시 민족주의적 정통성의 이념 자원이 아니라 안보에 관한 능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176쪽)
이러한 농지개혁의 결과, 1945년 14.2%에 불과했던 자작농의 비율이 1951년 80.7%로 상승했으며 순소작농의 비율 역시 50.2%에서 3.9%로 감소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계급의 비율이 2,3%에서 0.1%로 감소함으로써 지주계급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사실이다. (243쪽)
랜드 연구소의 연구 역시 치안을 국가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다. 최소한의 치안과 안보가 달성된 이후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경제성장의 기반이 제공되고, 최종적으로 외부 지원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법체계를 바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치안과 안보는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경제성장의 기반을 제공하는 개발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중시되어야 한다. (269쪽
출판사 서평‘국가 형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본 해방 전후사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인 이택선 박사(서울대 외교학과)는 ‘근대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서 출발한다’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따라 핵심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 재정 및 조세 기구의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국제정치적 배경을 살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형성 과정을 연구한 랜드 연구소의 표준 국가 모델과 비교 검토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21세기의 국가 건설 사례들과 비교해보아도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가졌던 대한민국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범적이면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떻게 그토록 부족한 자원과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에 수없이 볼 수 있는 파탄국가(failed nation)들처럼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또한 취약국가에서 출발하여 숱한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노출된 취약성이 어떻게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을까?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취약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 중 하나인 ‘수정주의’는 한국이 처음부터 과대 성장 국가로 출발했다고 말해왔다. 과대 성장 국가론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시민사회가 형성되기도 전에 근대적인 관료 체계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비대하게 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이택선 박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국은 처음부터 물적ㆍ인적 자원이 부족하여 국가기구가 허약한 취약국가로 출발했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한국은 과대 성장 국가가 아니라 모든 자원이 부족한 취약국가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가 건설’ 계획이 없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애당초 한국인들의 국가 건설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물적 자원이 부족해 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매우 불충분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유럽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 비율은 유럽과 일본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봉쇄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47년 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서 품위 있게 철수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해방 후 1년 동안 남한 경제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미군정은 예산과 자원 부족을 들어 장기적인 경제 건설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만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했고 소극적인 관리와 유지에 급급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정 기간에 도입된 4억 3,400만 달러어치의 원조 물자 가운데 식료품이 전체의 39%를 차지한 반면, 건축자재와 철도자재는 1.7%와 3%에 불과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군정은 공무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봉급마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공무원들이 상납과 뇌물에 의존하고 원조 물자를 밀거래하는 등 부패 문제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민족주의에 의존한 미군정
미군정은 물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이념 자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미군정도 처음에는 경찰과 군대에 친일 부역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항일 투쟁과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가진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고위 관리직에 임명하여 이념 자원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이승만과 같은 우파 정치인을 주로 지원하기보다는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중도파들을 포괄하는 연합노선을 시도했다. 청년단체도 극우 반공 단체 대신 임정 출신들을 중심으로 출범해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단체를 공식 후원했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인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관료제 행정을 담당할 인력의 부족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가 국가 건설에 참여하다
1946년 4월부터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자 치안 분야에서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틈타 공산 세력들이 국가 전복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치안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식량 문제가 심각했는데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월남민의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경찰의 부패와 금품 강요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1945년 9월 기준 한국 경찰의 봉급은 3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는 북한 위관급 장교들이 받은 260달러(1,300루블)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식량 부족과 만연한 부패는 민중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1일 대구 항쟁이 발발했다. 대구는 당시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강성한 도시였다.
미군정은 국가에 대항하는 폭력 세력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없어 결국 우파 청년단체들의 협력을 용인했다.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일 관료들도 국가기구에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한국인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경찰력을 증강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이르면 2~3년 전에 비해 경찰 규모가 2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광복군 중심의 군대에서 부일 세력의 군대로
1947년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도 규모가 커져 7개월 만에 3배 증가했다.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 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의 군 지도부는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은 갖췄을지 모르나 현대적 전술과 지식을 구비하지 못했고 무능했다. 1948년 제주 4ㆍ3사건과 여수ㆍ순천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시 기용되었다. 국가안보 위기가 발생하자 일제강점기의 전력을 이유로 스스로 근신하고 있었던 50~60대의 일본군 출신자들이 1947년 말부터 전격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8년부터 제주도와 여수, 순천, 옹진 지구 등 최전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이와 함께 20~30대의 젊은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 미국이 요구하는 현대전의 기준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군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국가 건설과 안보 위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협상 결렬로 갑작스럽게 국가 건설이 결정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민의 열망으로 제헌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분단 고착화를 염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1948년 4월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제주도에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나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이어 10월에 일어난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군 내 좌익 세력이 제주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여수ㆍ순천 사건은 정부 출범 2개월 만에 발생한 좌익의 본격적인 봉기였으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막대한 국가 폭력이 행해졌고 전체 희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여수ㆍ순천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보의 문제가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고 사회 분위기가 급변했다. 안보적 위험에서 초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들이 계속 시행되었는데,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또한 반민특위가 해산하게 되었으며, 경찰과 군대 규모가 급증했고, 국가안보의 명목으로 부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낯선 제헌헌법의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
대한민국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족했던 자원들을 대신하여 이념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즉 임시정부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제헌헌법의 제정이다. 특히 제헌헌법이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은 자유시장경제와 현격한 거리가 있어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낯선 측면이 있다. 이는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정치ㆍ경제 및 교육에서의 평등을 강조한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는 국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거리를 두었다. 제헌헌법 역시 중요 자원과 중요 기업에 관해 국유ㆍ국영 제도를 원칙으로 했으며 토지개혁과 의무무상교육을 주창했다. 이렇게 자본주의경제 질서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권리들이 헌법상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헌법을 계승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정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 부분 자리 잡은 현 시점에서는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물적ㆍ경제적 기반이 취약해 국가가 직접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들을 운영 관리해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적절한 조항들이었다.
토지개혁, 국가 건설의 정점
대통령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추진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민의 요구를 국가 건설 과정에 반영하고, 부일 관료들을 계속 기용한 탓에 훼손되었던 민족주의적 이념 자원을 어느 정도 보완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토지개혁은 수천 년 동안 농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군림하던 지주가 사라지고 국가 구성원 모두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계기였다. 1949년 6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초로 한 농지개혁 법안에 따라 농민들이 농지를 분배받았다. 토지개혁 성공의 이면에는 조봉암의 공로가 컸다. 물론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을 발탁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토지개혁으로 한국민주당의 경제 기반 약화, 농민의 지지 확보, 좌파의 공세 차단이라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자신 소유의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된 농민들은 한동안 이승만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북한 공산군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고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지했다.
중도파의 참여로 안정화되는 신생 공화국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의 실시로 국가에 대한 국민의 귀속감이 증대하자, 다수의 임시정부 출신 인사들과 중도파 인사들이 점차 대한민국의 건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거부했던 다수의 중도파들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부분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특히 삼균주의의 아버지인 조소앙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안재홍, 조소앙, 원세훈, 윤기섭, 오하영 등의 중도파 당선자들이 중도 무소속 세력을 이끌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제1공화국이 점차 안정화되어감에 따라 국가 내부의 자생적인 발전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기획처장 이순탁과 기획처의 중도파 관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획처는 경제기획원의 전신에 해당하는 기구로, 당시의 기획처는 생산과 분배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려는 중간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순탁은 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고 종합적인 국가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50년 즈음에는 예산이 균형을 이루고 세입이 증가했으며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환율이 안정되는 가운데 경제 전망이 바람직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제1공화국은 미국의 지원이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는데도 경제의 부분적 회복과 균형재정을 이루며 한계 속에서도 점차 국가성을 획득해나가고 있었다.
피땀눈물로 이룬 국가 건설의 역사
대한민국은 취약국가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건설의 역사는 그 출발선에서부터 안보, 물자, 인력 등 모든 차원에서 자원이 심대하게 부족했다. 따라서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수시로 동원한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은 금세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를 겪음으로 인해 민족을 배신했던 부일 관리들을 기용하고 폭력적인 우익 청년단체를 준국가기구로 활용하여 이념 자원을 훼손하는 질곡의 길을 걸어야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념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민족주의적 대의명분과 정치적 정통성은 높으나 국가 관료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던 인물들이 국가 건설 과정 초기에 기용되면서 국정 운영에 차질과 비능률이 발생했고, 전문가들이 이들을 대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 이후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념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었고, 건국 초기부터 노정된 취약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붕괴하지 않고 살아남아 상당한 수준의 번영을 이루었다. 촉박한 국가 수립 일정, 부족한 예산 및 자원 속에서 초라하게 탄생했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 강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 책은 취약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객관적ㆍ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최초의 시도이자, 그 시대를 산 건설자들에 대한 헌사이다.
이택선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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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규·김현철·김소영·이나미·이수석·이택선 지음,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
남광규·김현철·김소영·이나미·이수석·이택선 지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펴냄︱2019년 01월 10일 발행ISBN 979-11-5866-505-0 (95300)
한국 역사에서 공화주의 수용은 한말 조선의 군주주의에 대한 민본주의 대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말 민본을 바탕으로 하는 공화주의 국가가 지향한 목표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을 바탕으로 만민 참여를 통한 공공선 추구라는 공화주의 사회운동은 사회개혁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하 국권회복을 위한 규범적 지표가 되었다. 이 책은 공화주의를 중심으로 서구 근대의회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해 독립된 근대민족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던 6인의 활동상과 리더십을 조명하였다. 유길준, 서재필, 안창호, 김규식, 신익희, 이승만이라는 대표적 인물을 통해 개혁 추진 과정과 시대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역사적, 정치적 변동 과정의 첫 출발로서 19세기 후반부터 대한민국 수립 초기까지 언제, 어떠한 경로로 서구의 공화주의가 도입되었는지 살폈다. 당시 현실에서 한국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이 서구의 정치이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했는지도 함께 검토하였다. 이들 6인의 공화주의자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근대 이후 한국에서의 공화주의 수용과 발전 및 변화 그리고 비판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총설 _ 남광규
유길준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김현철
1. 서론
2. 근대 서구 정치제도의 이해와 수용
3. 서구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
4. 유길준의 정치리더십-‘전제왕권 견제와 민을 위하는’ 정부 추구
5. 결론
서재필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김소영
1. 서론
2. 갑신정변 참여와 개혁의 좌절
3. 미국 망명과 공화제에 대한 인식
4.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한 ‘공화주의적’ 개혁 시도
5. ‘소통’과 ‘협력’의 리더십과 그 한계
6. 결론
안창호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나미
1. 서론
2. 동양과 서양의 공화주의
3. 안창호의 생애
4. 안창호의 공화주의론
5. 안창호의 리더십
6. 결론
김규식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수석
1. 서론
2. 김규식의 생애
3. 공화주의와 김규식 리더십
4. 김규식의 리더십
5. 결론
신익희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남광규
1. 서론
2. 신익희의 생애
3. 자유주의를 기반한 의회민주주의의 실천
4. 신익희의 리더십
5. 결론
이승만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택선
1. 서론
2. 이승만의 생애
3. 이승만이 가지는 공화주의적 특징
4. 이승만의 리더십
5. 결론 이택선 2019.02.27
『한국 근대 공화주의자 6인의 리더십』
남광규·김현철·김소영·이나미·이수석·이택선 지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펴냄︱2019년 01월 10일 발행ISBN 979-11-5866-505-0 (95300)
한국 역사에서 공화주의 수용은 한말 조선의 군주주의에 대한 민본주의 대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말 민본을 바탕으로 하는 공화주의 국가가 지향한 목표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을 바탕으로 만민 참여를 통한 공공선 추구라는 공화주의 사회운동은 사회개혁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하 국권회복을 위한 규범적 지표가 되었다. 이 책은 공화주의를 중심으로 서구 근대의회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해 독립된 근대민족국가를 형성하려고 했던 6인의 활동상과 리더십을 조명하였다. 유길준, 서재필, 안창호, 김규식, 신익희, 이승만이라는 대표적 인물을 통해 개혁 추진 과정과 시대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역사적, 정치적 변동 과정의 첫 출발로서 19세기 후반부터 대한민국 수립 초기까지 언제, 어떠한 경로로 서구의 공화주의가 도입되었는지 살폈다. 당시 현실에서 한국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이 서구의 정치이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했는지도 함께 검토하였다. 이들 6인의 공화주의자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근대 이후 한국에서의 공화주의 수용과 발전 및 변화 그리고 비판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총설 _ 남광규
유길준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김현철
1. 서론
2. 근대 서구 정치제도의 이해와 수용
3. 서구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
4. 유길준의 정치리더십-‘전제왕권 견제와 민을 위하는’ 정부 추구
5. 결론
서재필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김소영
1. 서론
2. 갑신정변 참여와 개혁의 좌절
3. 미국 망명과 공화제에 대한 인식
4.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한 ‘공화주의적’ 개혁 시도
5. ‘소통’과 ‘협력’의 리더십과 그 한계
6. 결론
안창호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나미
1. 서론
2. 동양과 서양의 공화주의
3. 안창호의 생애
4. 안창호의 공화주의론
5. 안창호의 리더십
6. 결론
김규식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수석
1. 서론
2. 김규식의 생애
3. 공화주의와 김규식 리더십
4. 김규식의 리더십
5. 결론
신익희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남광규
1. 서론
2. 신익희의 생애
3. 자유주의를 기반한 의회민주주의의 실천
4. 신익희의 리더십
5. 결론
이승만의 공화주의와 리더십 _ 이택선
1. 서론
2. 이승만의 생애
3. 이승만이 가지는 공화주의적 특징
4. 이승만의 리더십
5. 결론 이택선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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